시암송칼럼/시암송칼럼(2020) 11

가을 문학기행

며칠 전 강진에서 영랑문학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수상자는 박라연 시인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박 시인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수상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박 시인의 초중고 시절 절친인 드맹 시모임 A회원의 차로 네 사람이 일행이 되어 시상식 참석을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점심을 위해 학동에 있는 식당 ‘데이지’에 들렀습니다. 식당 주인은 얼마 전에 ‘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란 제목의 수필집을 낸 분입니다. 제2 수필집을 준비하고 계신지 물으니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쁜 식당일을 하면서도 전문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분이 존경스럽게 보였습니다. 시상식이 열리는 영랑생가 옆 시문학파기념관에 도착한 후 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아홉분의 시인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김영랑, 박용철, ..

긍정의 삶

소설가 박상우 님의 수필에 하루의 소중함에 대한 구절이 있습니다. “하루를 온전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생처럼 오묘하고 우주처럼 방대한 시간의 단위가 하루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헛되게 사는 사람들은 하루의 시간 경계를 자각하지 못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날마다 되풀이 되는 하루는 인생의 압축이고 축약입니다. 하루를 잘 사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을 잘 사는 것입니다.” 구상의 ‘오늘’ 이란 시도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어느 문우(文友) 이야기

시암송본부에서 만든 시카드 덕분에 알게 된 심순영 선생은 지난 해 초등학교 보건교사에서 정년퇴임하고 다시 방과 후 교사로 일하고 있는 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자신과 가정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그는 성경 암송을 좋아해서 지금까지 구약 시편을 중심으로 300절 이상을 외웠다고 합니다. 올들어 영어 성구를 외우기 시작한 나에게 그분의 암송 경험이 좋은 자극과 도움이 됩니다. 지난 5월엔 내게 제자 얘기를 보내왔습니다. “어제는 저의 유일한 제자 김현경(가명)이 제가 근무하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붉게 핀 작약 세 송이와 마카롱 한 상자를 들고요.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현경이는 초등 6학년 때 소아당뇨에 걸려서 지금까지 투병생활을 하는데 현재 신장투석을 하면서 D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답니다...

한 시인에 대한 추억담

오래 전에, 서울대 시학교수에서 정년퇴임한 오세영 시인에 대한 각계인사들의 추억담을 모아 놓은 책 ‘오세영, 한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요즘도 이따금 들춰보는 책입니다. 이 책 덕분에 시인에 대한 여러 모습을 알게 되어 좋았고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문인들의 글을 통해서 그분들의 진면목의 일부를 엿볼 수 있는 행운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의 필자들은 주로 시인들이지만 의사와 법조인도 있고, 화가 탤런트 스님도 있습니다. 문인 중에는 고은, 이어령 등의 선배 문인과 이건청, 강은교, 오탁번 등의 동년배의 시인, 최동호, 이승하, 조정권 시인 같은 후배 문인, 방민호 서울대 교수, 나민애 씨 같은 제자의 글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습니다. 시에 관심을 가진 후 나는 그분의 강연도 여..

국수가 있는 풍경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골 장에 가면 장작불에 팥칼국수가 끓고 있는 큰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한 그릇 맛있게 먹고 가기도 했지요. 싼값에 서민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국수가 좋아 길을 가다가도 국숫집이 눈에 띄면 반갑습니다. 예전엔 국숫발을 널어 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요즘은 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습니다. 정진규 시인은 길을 가다가 ‘옛날 국수가게’를 발견하고 좋았나 봅니다. 그는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고 노래했습니다.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 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경전 암송의 기쁨

20여 년 전,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7개월쯤 무직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춥고 힘든 날들이었지요. 이때 나를 달래 준 것은 영어성경 암송이었습니다. 그후 직장을 갖고부터 시 암송에 빠져 성경과는 멀어지고 자연히 애써 외웠던 구절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늘 ‘다시 해야지’ 하면서도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올초부터 예전처럼 성구들을 외우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져서 그런지 요즘엔 성경 말씀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이 꿀보다 달다”고 고백했는데 거기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어 암송은 처음엔 힘들어도 나중엔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외우면서 영어의 낯설고 어려운 단어에 부딪칠 때가 있지만, 그런 단어를 기억해내려는 노력이..

읽고 쓰기에 생애를 건 작가

문정희 시인의 글에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장군이 통치하는 나라에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던 남자가 있었답니다. 전신을 땀에 적셔가며 온몸으로 연습하는 배우의 연습장에 장군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고 합니다. “연습을 많이 했군!” 배우가 대답합니다. “생애를 걸었습니다!” 장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내뱉습니다. “생애를 걸었다고? 그게 대가(大家)의 길이지!” 이 얘기에 걸맞는 작가가 있습니다. 장석주 시인입니다. 최근 몇 개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알았던 그의 삶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을 찾아 외지로 떠난 부모와 떨어져 초등 3학년 때까지 외할머니 집에서 지냅니다. 여섯 살 때 상여꾼의 슬픈 곡조를 듣고..

비범한 삶이 주는 신선한 충격

비범한 삶은 때로 진정한 감사도 참다운 기쁨도 모른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별한 감동을 줍니다. 한 분은 스웨덴 출신 복음성가 가수 레나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선천성 장애로 두 팔이 없고 한 다리도 짧은 악조건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두 팔이 없이도 수영, 요리, 십자수, 피아노, 운전 등 못 하는 게 없습니다. 그녀는 놀라운 긍정의 삶으로, 아름다운 노래로 어두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노래 부르기 전 그녀의 짧은 연설의 한 대목이 참 아름답습니다. “저는 제 삶이 주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그녀는 절망적인 현실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장애를 극복해나갔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믿을 수 없는 환한 표정은 두 팔에 한번도 감사해본 적이 없는 나를 ..

시를 가장 많이 읽는 과학자

최근 본받고 싶은 어른(81세) 한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학채널 초대손님으로 나온 장인순 박사입니다. 이분은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항공대 초대총장을 역임한 김호길 박사가 과학자 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외운 분이라면 장 박사는 시를 가장 많이 읽는 과학자입니다. 그의 연구실에는 책이 많이 보였습니다. 2005년 원자력연구소장 퇴임 후 3천 권쯤의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 중엔 인문학 책이 많은데 시집도 1600여 권 모았다고 합니다. 그가 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학 중 영시(英詩)를 만나게 된 후라고 합니다. 영시엔 용기와 위로를 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시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가 예로 든 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등입니다. 몇 년 전에 백 권..

시수(詩瘦)

허영자 시인은 경남 함양 출신 시인입니다. 80대 중반의 원로 시인이지요. 지난 해 남한산성 아트홀 연극 관람 후 시인을 알아보고 반가워서 다가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밝은 미소로 맞아주셨습니다. 몇 년 전 책을 내면서 시인의 시를 두 편 인용한 것에 대한 저작권료를 드리기 위해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김남조 시인을 빼면 가장 연세가 많은 여류 시인일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영상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은발이 아름다운, 품격이 느껴지는 멋진 할머니였습니다. 대담 중 그의 말씨는 또록또록하고 언어가 정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고향 함양에는 강변공원 길에 그의 세 편의 시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은발’, ‘자수’ 그리고 ‘작은 기도’입니다. ‘은발’이란 시는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짧고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