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골 장에 가면 장작불에 팥칼국수가 끓고 있는 큰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한 그릇 맛있게 먹고 가기도 했지요.
싼값에 서민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국수가 좋아 길을 가다가도 국숫집이 눈에 띄면 반갑습니다. 예전엔 국숫발을 널어 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요즘은 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습니다. 정진규 시인은 길을 가다가 ‘옛날 국수가게’를 발견하고 좋았나 봅니다. 그는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고 노래했습니다.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 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산문시 ‘옛날 국수 가게’) 간판도 없는 국수가게에서 화자와 소박하고 선량할 것 같은 주인아저씨의 따뜻한 대화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국수에 대한 시를 생각하면 이상국의 ‘국수가 먹고 싶다’도 떠오릅니다.
“국수가 먹고 싶다//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화자는 허름한 국숫집 아주머니에게서 어머니를 느낍니다. 화자의 시선은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 늘 울고 싶은 사람들에 머뭅니다. 요즘처럼 코로나 사태로 직장을 잃거나 손님이 줄어 생계가 막막해진 소상공인들도 화자의 마음을 차지할 것 같습니다.
남광주 시장에, 학원에서 수학 강사를 했던 아주머니가 주인인 국숫집이 있습니다. 여주인이 쉬는 조그만 공간엔 문학잡지들이 쌓여져 있습니다. 빛고을의 유명 시인들이 다녀간 흔적도 있습니다. 몇몇 시인들의 시구도 사진틀에 담겨 걸려 있고, 작가들의 낙서도 보입니다. 이상국 시인도 이곳을 다녀갔나 봅니다. 식당 벽에 걸린 시인의 단정한 육필 몇 행이 시선을 끕니다.
문태준의 시 ‘평상이 있는 국수집’을 읽으면 몇해 전 어느 여름날 우리 시 회원들이 담양 국수거리 한 가게 평상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제 코로나 사태도 조금씩 수그러드니 다시 그런 즐거운 자리를 가져보고 싶네요.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수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중략)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이번 호 암송 추천시는 박두순 님의 ‘가위 바위 보’입니다. 화자는 꽃에서 가위 바위 보를 생각해냈네요.
가위 바위 보/ 박두순
봉오리 맺으면
바위
꽃잎 두 장 나오면
가위
활짝 피면
보
꽃잎들의
가위 바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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