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자 시인은 경남 함양 출신 시인입니다. 80대 중반의 원로 시인이지요. 지난 해 남한산성 아트홀 연극 관람 후 시인을 알아보고 반가워서 다가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밝은 미소로 맞아주셨습니다. 몇 년 전 책을 내면서 시인의 시를 두 편 인용한 것에 대한 저작권료를 드리기 위해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김남조 시인을 빼면 가장 연세가 많은 여류 시인일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영상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은발이 아름다운, 품격이 느껴지는 멋진 할머니였습니다. 대담 중 그의 말씨는 또록또록하고 언어가 정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고향 함양에는 강변공원 길에 그의 세 편의 시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은발’, ‘자수’ 그리고 ‘작은 기도’입니다. ‘은발’이란 시는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짧고 느낌이 좋아 외우고 싶은 시로 다가왔습니다. “머리 위에/ 은발(銀髮) 늘어가니/ 은(銀)의 무게만큼/ 나/ 고개를 숙이리.” 장석주 시인은 이 시에 대한 아름다운 감상문을 남겼습니다. “젊음이 축제고 화려한 가장행렬이라면, 노년은 순례들을 끝낸 뒤 그것을 반추하며 보내는 인생의 정점이다. 머리칼은 서리 내린 듯 은발로 변하는데, 검은 머리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다. 은발은 그 과거를 지나서 도달한 현재다. (중략) 은만큼 가벼워진 영혼이라니! 노시인은 ‘은의 무게만큼’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은발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일부러 돌아서서 그를 한 번 더 바라본다.”
그는 여전히 시 앞에서 겸손합니다. 공부의 모자람을 아쉬워합니다. 시를 쓰고 나서 처음엔 행복에 겨워하다가 나중엔 부끄러움을 느낀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시를 쓸 때는 자긍심, 자홀감(自惚感)을 가져야한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전문가 의식을 갖고 전심전령을 바쳐야한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노래는 부를 수 있고 간단한 연주는 할 수 있지만 전문성악가나 전문연주자가 되기 위해선 피나는 연습을 해야하듯이 시인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광주교대 전원범 교수는 어휘력을 위해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고 합니다. 한 예로 조지훈의 ‘승무’를 들었습니다. 온 정성을 들여 이 시를 쓴 조 시인은 시작(詩作)의 지난(至難)한 과정을 시수(詩瘦)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시를 써서 수척해졌다는 뜻이지요. 문학 외의 책도 폭넓게 읽어야 하고 여러 인생 체험도 가져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암송에도 관심을 가지고 즐기는 그는 대담자의 요청에 이형기의 ‘낙화’를 낭랑한 음성으로 낭송했습니다. 맑은 시를 맑은 시인의 맑은 목소리로 들으니 맑은 계곡물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중략)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번 호 암송추천시는 이인원의 ‘사랑은’입니다. “사랑은 눈독 들일 때 아름답다”,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구절입니다.
사랑은
이인원 (1952 ~ )
눈독 들일 때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무등일보 격주간지 아트플러스에 연재한 칼럼 '문길섭의 행복한 시암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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