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다형 문학제
제2회 다형 문학제 소식을 듣고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 일찍 남구문예회관에 도착했다. 로비엔 낯익은 광주 문인들이 삼삼오오 둘러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시암송반 회원들도 여러 분 오셔서 반가웠다 (시암송반 수업 때 다형 문학제 소식을 알려드렸다).
오세영 시인과 한국시인협회 회장이신 이건청 시인의 모습도 보였다. 난 오래 전부터 이건청 시인의 “젖고 있는 들판에게”란 시를 애송해온 터라 그분의 실물을 뵙게 되어 너무 좋았다. 둥근 얼굴에 편안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다형기념사업회 회장이신 손광은 교수의 인사말씀이 있었다. 다형은 광주전남 지역의 40여 분의 시인을 엄격하게 길러낸 모든 시인의 스승이라고 칭송했다. ‘k시에 올라’ 같은 시를 소개하며 다형은 고향인 광주를 유별나게 사랑했다는 말씀도 있었다.
이건청 시인은 축사에서 광주를 시향이라 부르며 “현대 사회에서 분화되고 개별화된 인간의 근원을 ‘고독’속에서 건져 올려 보여준 선생의 시편들은 오늘날의 한국시가 지향해야할 방법과 가치가 무엇인지도 일러주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
학술발표자로 나온 영광 출신의 오세영 시인은 수창초등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다며 광주와의 인연을 소개한 후 다형의 문학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했다: 역사의식이 투철하신 분, 지적서정시를 쓰신 분, 고독의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를 하신 분. 오 시인은 서울대학에서 오래 교수생활을 하신 분답게 다형의 시세계를 유창한 달변으로 풀어주셨다.
두 번째 발표는 한남대학을 다닐 때 다형에게서 직접 배웠다는 광주대 이은봉 교수가 맡아주었다. 김현승의 시에 나타난 고독에 대해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시인 김현승은 자신의 시에서 끝내 신을 잃고 독립된 주체가 되어 절대고독, 곧 고독의 끝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시를 통해 그가 추구해온 고독은 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근원적인 그리움의 대상, 곧 근원적인 객체와 명확하게 분리된 자율적인 정신차원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세 번째 발표는 피아니스트인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다형의 따님이 해 주었다. 나는 뜻밖에 이곳에서 다형의 따님을 보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딸로서 아버지를 가까이서 보고 살았을 테니 숨겨진 일화가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동시대의 문인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아버지를 대했다면, 제자 후배들에겐 아무 때나 와서 안길 수 있는 산 같고 바다 같은 존재”이셨다고. 박봉우 시인 같은 이는 술을 마시고 자정쯤 다형의 집 앞에서 “김현승 시인은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이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여러 번 잠자다가 깬 적이 있었다는 얘기도 해 주었다.
다형이 야밤중에 시를 쓰며 그 구절들을 낮은 소리로 읊조려보셨다던가, 나라건 문단이건 ‘정치’라는 단어 앞에서는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셨다는 일화도 다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 덕분에 마음의 부자로 살 수 있었다면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신 값진 정신과 신앙의 유산은 다른 어떤 재산보다도 힘이 세고 영구적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따님의 발표 후엔 다형의 남동생 한 분이 나오셔서 가족 소개와 함께 다형의 교우관계, 특기 등을 얘기해 주셨다. 친구로서는 숭실전문 동문인 황성수 박사와 ‘가고파’ 작곡가인 김동진 선생 그리고 차남진 목사가 계셨고, 학창시절엔 선수로 활동할 만큼 연식정구와 축구를 잘 하셨다고 한다. 부친이 목사인 다형에게 미국에서 목회하는 목사 아들이 있다는 얘기도 특별하게 들렸다.
다형문학제에 와서 뵙고 싶었던 시인도 만나고, 좋은 강연도 듣고 다형의 가족에게서 사적인 얘기도 듣게 되어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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