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시사랑/시인들의 일화

한하운 시인

日日新 2010. 10. 30. 20:55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의 후유증으로 문단이 시끄럽던 75년 2월 28일 아침, 해방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한국시단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한 시인이 문단의 무관심 속에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하운이었다. 그는 흔히 천형으로 불리는 나병환자로 평생을 살았으나 정작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나병이 아닌 간장염이었다.

 

그의 시는 한때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많이 읽혔고 50년대 이후 여러 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은은 중학교 시절의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 한복판에 떨어져 있는 <한하운 시초>라는 제목의 낡은 시집을 주워 읽고 느낀 벅찬 감동이 시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 첫 번째 계기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 <보리 피리>는 그 애잔한 서정적 가락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추억 속에 고이 간직돼 있다.

 

한하운은 3.1 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얼굴과 피부 곳곳에 나병환자의 증세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다니던 열서너 살부터였다. 하지만 운동선수로 활약할 만큼 건강했던 데다가 의사가 단순한 피부병으로 진단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증세가 나병임을 알게 된 것은 중국에 유학해 국립 베이징대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그래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대학을 마친 후 귀국해 도청에 근무하면서 시를 쓰고 치료에 전력하는 등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47년 월남한 것은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 좀더 확실한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병철을 여러 차례 찾아간 끝에 추천을 받아 <신천지>잡지에 12편의 시를 발표하고 뒤이어 정음사에서 첫 시집 <한하운 시초>를 상재하면서 남쪽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남쪽 문단에서의 활동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나병증세는 이미 얼굴에까지 완연하게 나타나 문인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그를 외면했고, 작품을 들고 잡지사에 찾아가면 작품을 실어주기는커녕 원고를 만지기조차 꺼려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그를 추천해준 이병철이 월북했으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로 시작되는 <전라도 길> 등 몇몇 시가 공산주의를 상징하니 한하운은 ‘빨갱이’에 틀림없다는 한 시인의 어처구니없는 모함이 주간신문에 크게 기사화돼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삶을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병과 싸우고 나병을 기피하는 사회현실과 싸우는 강인함을 보였다.

 

60년, 음성나환자 판정을 받아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게 된 한하운은 보육원장, 농장장, 종축농장, 농업기술학교장, 사회복귀협회장 등 여러 일자리를 거치면서 음성나환자 복지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무하문화사 라는 출판사를 설립해 자신의 시집은 물론 여러 시인의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한하운은 나환자 수용소의 총무로 일하던 시절, 가깝게 지내던 나환자 여성과 결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지만 결혼 전 여러 여성과 사랑을 나눴고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그가 남긴 <나의 슬픈 반생기>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보면 친구 여동생과의 진했던 첫사랑은 그가 나병환자임이 밝혀지면서 파국을 맞았고, 베이징대 재학 중 깊은 사랑을 나눴던 미모의 여성 유학생은 그가 나병환자임을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여러 여성과의 연애 경험담이 나오는데 그와 가까웠던 몇몇 문인은 그 여성이 모두 정상적이었던 까닭에 그 자신도 정상인으로 보이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눈물겨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코를 높이기 위해, 혹은 눈썹을 심기 위해 성형외과를 찾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부작용 때문에 얼굴은 더 흉해졌고 날씨에 따라 피부가 변색하는 후유증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는 평생 나병을 말 그대로 ‘천형’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벌>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죄명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정규웅,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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