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하나의 커다란 산맥
시인 지훈, 학자 지훈, 논객 지훈 이 중 하나도 빠질 것이 없는 것이 인간 지훈이다. 고은은 20여 년 전 “서정주는 하나의 정부다”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필자는 때로 이 언명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의아심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팔순이 지나서도 왕성한 詩作활동을 계속하는 미당 서정주를 볼 때 고은의 발언은 그 나름의 설득력 있는 예견이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이는 어디까지나 시인으로서의 길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지훈은 동세대의 다른 시인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오히려 지훈의 인간상은 더 거슬러 올라 만해 한용운에게서 어떤 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 학자, 논객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아우른 전인적 인간상으로서 지훈의 남다른 특징이 여기서 부각되기 때문이다.
시를 다루는 언어적 장인술이나 지식만을 포함한 직업적 전문성 그리고 재빠른 변신을 일삼는 사회적 처세술과 지훈은 격이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세기말의 과도기적 혼란이 가중될수록 사람들은 이 시대를 밝혀줄 등불로서 스승을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들은 언어적 연금술에 골몰하고 지식인이나 교수들은 지식의 바겐세일을 일삼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시세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뒤쫓는 변신을 거듭하기에 영일이 없는 것은 아닐까. (최동호, 시인) <히말라야와 정글의 빗소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