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시사랑/시인들의 일화

고은 시인 편

日日新 2010. 12. 10. 20:36

 

정예영( 프랑스어판 ‘만인보’ 역자) : 선생님의 시는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고은 : 내 지난날의 몇몇 풍경을 말하겠습니다. 나는 1940년대 후반 4킬로미터의 길을 통학하는 중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방과 후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었어요. 길가에 무엇인가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것은 한 줄기 빛을 뿜어댔어요. 가까이 갔더니 책이었어요. 더 가까이 갔어요. 시집이었어요. 누군가가 분실한, 새로 산 것이 틀림없는 시집이었어요.

 

나병에 걸려 전국의 여기저기와 수용소를 떠도는 시인 한하운의 시집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에게 읽히기 위해 그곳에 놓여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그것을 주저 없이 집어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한밤중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벅찬 감동으로 사무쳤습니다. 울었습니다. 실컷 울고 난 뒤는 새벽이었습니다.

 

나는 두 가지를 나에게 맹세했습니다. 첫째는 나도 나병에 걸려서 발가락 하나하나가 썪어 떨어져 나가며 산하를 떠돌면서 자신의 저주 받은 생을 견디다가 아무 데서나 쓰러져 죽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나도 한하운처럼 떠돌며 시를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은, 시인) <나는 격류였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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