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직장생활에서 물러난 해던가, 그해 연말 대학 동기동창인 소설가 박태순이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소회를 이메일로 띄우며 서두에 이 시(“해”)를 인용했다. 이 시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읽었지만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닿는 묵직한 무엇이 있었다. 그런 느낌에 젖어들면서 기억은 1970년대 중반으로 줄달음쳤다. 74년 봄이던가, 박태순을 비롯해서 고은 이문구와 함께 댁으로 찾아가 박두진 시인을 만난 때였다.
그들 세 사람은 ‘문학인의 양심’을 앞세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을 서두르면서 몇몇 원로문인의 찬동 내지 서명을 받아내고 있었다. 박 시인을 찾아가면서 박태순은 거의 강제로 기자를 동행시킨 것이다. 박 시인은 이런저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직됐다가 복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의 부인(아동문학가 이희성)은 남편이 또 일을 저지를까봐 그림자처럼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감시’한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날 부인은 손님들에게 차만 권하고 자리를 떴다. 아마도 박 시인의 강력한 의사에 따른 것 같았다. 후배문인들에게 취지를 듣고 선뜻 서명한 다음 박 시인은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 ‘옳은 것은 언제나 옳고 틀린 것은 언제나 틀린 것’이라는 말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것이 그의 진면목이었고, 일관된 삶의 자세였던 것이다.
박 시인이 평생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는 것은 그의 여러 행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해방 후 좌익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한국문학가협회 창립에 참여하고서도 그 이후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측면을 더 많이 드러낸 문학단체에는 일절 관여한 일이 없다는 점,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하는 교수성명서 발표에 앞장섰던 일,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문제됐을 때 감정서를 쓰고 법정에 나가 김지하를 옹호했던 일 등이 그렇다.
일상생활 주변을 살펴보면 그의 올곧은 자세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생 사리를 분명하게 따지고 명리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여러 일화가 있다. 후배문인에게 이권이 얽힌 어떤 일에 참여할 것을 권유 받자 호령해서 쫓아보내는가 하면 졸업을 앞둔 제자들이 사은의 표시로 돈을 거둬 전달하자 평생 제자로 생각하지 않겠다며 돈봉투를 내팽개친 일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인간미가 돋보이는 다정다감한 일면도 있다. 알게 모르게 박 시인의 도움을 받은 후배와 제자가 여럿이라 아직도 박 시인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문인이 많다. 특히 박 시인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살림을 도맡았던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됐을 때 그녀의 어려운 형편을 딱하게 여겨 혼수를 챙겨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신부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갔던 일은 유명한 일화다.
기자가 원고청탁이나 작품심사 등의 일로 자주 드나들던 70년대 초중반 그의 집은 연세대학교 정문 맞은 편 우체국 건물을 끼고 가파른 언덕길로 올라가 꼭대기 평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여러 종류의 꽃이 질서 있게 심어져 있었고, 박 시인 자신이 수집했음직한 다양한 형상의 수석과 예쁜 분재가 집안에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이 하늘과 해, 산과 바다를 사랑하던 박 시인의 일상적 모습이었다.
그의 겉모습은 깡마르고 유약해 보였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했기에 건강을 유지하면서 동년배 문우들보다 오래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박 시인은 기자에게 ‘산행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며 건각을 자랑하기도 했다. 1998년 편안하게 일생을 마쳤으니 82세였다. 청록파의 동인인 조지훈보다 30년을, 박목월보다 20년을 더 살았다. 한해가 지나가고 또 새해가 밝아오면 ‘희망’을 생각하고 그의 시 <해>를 떠올린다.
(정규웅,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아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