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에 올라
내 마음이 한없이 가난하여 산 속으로 동냥을 떠나면 산은 갈 때마다 인자한 보살이 되어 내게 그 많은 삶의 양식들을 아낌없이 퍼부어준다. 산은 악기가 되어 귀를 즐겁게 하기도 하고, 엄니의 두툼한 손이 되어 쓰린 배를 슬슬 문질러 주기도 하고, 산은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이 되어 괜찮다며 처진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한다. 그러나 산이 매번 인자한 생의 부모로서 나를 대하는 것은 아니다. 산은 내 삶이 정직하지 못할 때 회초리되어 종아리를 아프게 하기도 하고 죽비가 되어 등허리를 따갑게 하기도 한다.
엊그제 일요일 북한산은 생강나무며 진달래며 개나리가 봉오리를 터뜨려대기 시작했다. 꽃 피는 것을 보면 자못 엄숙해지고 그것에 대해 외경심을 느끼게 된다. 꽃은 그냥 꽃이면서 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꽃이야말로 우주 그 자체다. 꽃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꽃나무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다 아는 것처럼 꽃나무 하나가 일가를 이루는 데도 우주 안의 삼라만상의 참여가 필요하다. 적당한 햇살과 별과 달과 바람과 습기와 흙의 자양이 골고루 필요한 것이다. 어느 하나 불충분하다면 그것은 온전한 꽃 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어찌 경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꽃 중에도 산 속에서 만난 꽃이 더욱 유별나게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땀 흘린 끝에 만나는 꽃이라서일까. 꼭이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정원에서 가꾸는 꽃은 사람의 힘이 보태진 것이지만 산 속에서 핀 꽃은 저 혼자 우주의 교감과 조응 속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 속에 핀 꽃을 보며 새삼 말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저 온몸, 온 생으로서의 언어인 꽃 앞에서 그 무슨 같잖은 말이 필요하겠는가. 꽃 피는 속도가 6세 어린이의 보폭과 같다 하니 이제 며칠 후면 만산홍화(滿山紅花)로 전국이 후끈 달아오를 것이다.
(이재무, 시인) <생의 변방에서, 화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