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시사랑/시인들의 일화

박목월 시인

日日新 2009. 10. 26. 21:50

시인의 일화 - 박목월 편


할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 아버님(박목월 시인)은 ‘나그네’라는 시를 지으실 때에 느꼈던 심정의 한가닥을 말씀해 주셨다.


아버님은 ‘나그네’를 ‘문장’지(誌)에 발표하시기 전(前)해에 경주의 은행에 다니셨다고 한다. 내가 1939년 생이니까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이었던가 보다.


그때 아버님은 할아버지께서 이공학을 전공하라고 강요하시는 것을 뿌리치고 일본에 유학하고자 은행에 다니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에서 금전 출납이 잘못되어 아버님이 물어내야 할 입장이 되었다. 그러니 월급에서 공제할 수밖에 없었고 또 할아버지는 문학을 하는 아들이라 도움도 주시지 않아 생활이 어렵기 짝이 없었다.


어느 여름날 아버님은 은행 업무를 끝내고 황혼이 물들 무렵 30리 길을 걸어서 퇴근하고 있었다. 여름이라 벼가 한창 자라는 논길을 걸어오자니 논두렁을 덮은 미끈거리는 흙 위에 발자국이 남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분명히 운동화 - 일제 때 지까다비라고 부르던 것 -를 신었지만 그것은 발등만 덮을 뿐 밑창이 다 닳아서 발 무늬가 그대로 진흙 위에 남아 있었다.


발바닥이 그대로 찍혀진 진흙을 보면서 발금의 가느다란 선은 인간이 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실날처럼 펼쳐 있고 멀리 하늘에 붉게 타는 저녁은 언제나 살고 싶은 이상의 저편으로 나타나 보였다는 것이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가는’ 나그네의 마음은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비세속적 세계에 대한 염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이 자그마한 창작 동기를 들으면서 가난해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젊은 시인의 심정을 느끼고 그것이 승화되어 시가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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