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인
1949년에 들어 서울에는 해괴한 소문이 한 가지 떠돈다. “명동에서 문둥이가 시를 판다.” 그 무렵 이미 명동은 제법 번화한 거리였다. 멋쟁이 남녀, 작가, 시인, 화가, 실업자, 거지, 앵벌이, 아편 중독자, 병역 기피자, 양공주, 건달... 서울의 복판에 자리 잡은 명동에는 갖가지 인간 유형이 모여든다.
어느 날 밤, 명동의 한 바(bar)에 어깨에 닿을 만큼 머리가 긴 거지 하나가 나타난다. 거지는 대여섯 명의 신사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다가간다. “뭐요?” 거지는 신사들 앞에 하얀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종이에는 ‘파랑새’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 있었다. 한 신사가 제목을 들여다보며 “Green bird, Green bird."라고 중얼거린다.
“이거 당신이 지은 거요?” “네, 시가 되건 안 되건 한 장 사 주세요.” “여기에 계신 분들이 시인들이오. 자, 내가 소개를 하지. 이분은 정지용, 이분은 이용악이라는 분이오.” 그들은 시를 파는 문둥이 거지에게 술잔을 권한다. 거지는 사양한다. “인간이 사는 조건은 육체적 조건으로 사는 것이 아니오. 정신적인 것이 제일이오. 어서 드시오.” 정지용은 호주머니 속에 있던 고급 만년필을 꺼내 거지의 손에 쥐어준다. “내 오늘밤은 돈이 없으니 대신 이 만년필을 갖다가 쓰시오.” 그러나 거지는 만년필을 탁자 위에 놓고 허둥지둥 바에서 나간다. (장석주, 시인) <나는 문학이다, 나무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