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아트플러스 詩 칼럼 (2023. 3. 1 발간 예정)
오탁번 시인을 기리며
며칠 전 오탁번 시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오래 전에 광주의 한 문학행사에서 뵈었던 중절모를 쓴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따님 가혜 씨가 아버지의 지인에게 전화로 “아버지께서 어젯밤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다”고 알렸다고 합니다. 이 딸의 결혼식 때 시인은 아빠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담은, 딸의 이름을 제목으로 단 시를 남겼지요. “좜좜/ 고사리 손// 눈부신/ 웨딩드레스// 아빠 눈은/ 은하수 물결// 가혜 눈은/ 별빛” (‘오가혜’)
그분의 삶을 돌아보면 한 인간으로, 작가로서 성실한 삶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꿈꾸기 어려웠을 때 어린 탁번을 눈여겨 본 선생님이 원주에서 군인이었던 오빠집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주어 중고교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선생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영희 누나’란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백운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등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느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나를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오빠도 군대에 가서 나는 너무 외롭단다/ 선생님이 누나가 되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봄언덕에서/ 나는 산새처럼 지저귀며 날아올랐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누나다 영희누나다/ 가을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하략)”
시인은 중고교 때 백일장에서 수상도 하고 학원문학상도 타는 등 문학소년으로 지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선 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재학중엔 세 개의 신문사 신춘문예에 동화, 시, 소설에 입상하여 주목을 받았고, 그후 모교인 고려대에서 정년을 맞을 때까지 후학을 지도했습니다.
늘 국어사전을 끼고 살면서 금싸라기 캐듯 참신한 낱말을 찾곤했던 그는 자신의 시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시를 생각하며 새벽잠을 깨고, 시를 쓰며 자정을 넘길 때처럼, 내 영혼과 가장 똑바로 마주할 때는 없다.”
유자효 시인은 오 시인에 대해 “시와 함께 살아 간, 시로 자신을 형상화 한, 시로 생애를 완성한 시인”이라고 평했더군요.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가 재밌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의 천진난만함이 시에도 배어있어 그러겠지요.
그가 가장 아끼는 자신의 시는 ‘백두산 천지’(정지용 문학상 수상작)라고 합니다. 먼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교과서에 실릴 만하고 또 그러길 희망했다는 시입니다.
틀에 매이지 않는 자전적 소설을 쓰고 싶다 하셨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셨네요.
이번 호 암송추천시는 대구에 사는 박규하 군의 동시 ‘함께하면’입니다. 짜임새 있는 시 형식에 아름다운 마음을 잘 담았네요.
함께하면/ 박규하 (초등학교 4학년)
손가락은 혼자서 물건을/잡을 수 없어요/ 개미는 나뭇잎을 혼자서/ 들 수 없지요// 하지만/ 함께하면 할 수 있어요/ 함께하면 아름다워져요// 함께 비추는 달과 별처럼/ 함께 나뭇잎을 드는/ 개미들처럼//우리들에게도/
배려와 함께하는 마음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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