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과의 만남

영화 <시> 느낌글

日日新 2010. 5. 29. 07:22


영화 <시> 느낌글 - 본다는 것


영화 <시>는 ‘poem’이 아니라 ‘poetry’이다. ‘poetry’는 작품 한 편이 아니라 온갖 시를 합하여 표현한 단어이다. 한 사람의 생애 전체가 그대로 시라는 뜻으로 이 제목을 붙인 것일까? <시>는 표현이 절제된 영화이다. 다 드러내지 않고 살짝살짝 숨겨놓은 여운들이 꼭 한 편 한 편의 ‘poem’ 같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그림으로 치면 사실주의이다. 시대의 아픔을 그리는 사실주의랄까.


<시>에서는 몇몇 배우를 빼면 어느 길목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얼굴들이 화면에 가득 찬다. 배경음악은 없고 자잘한 소음이 그대로 담겨 나온다. 소음이 걸러지지 않아선지 얼핏 내가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 같다. 시강의를 듣는 거기에, 시낭송을 하는 거기에, 미사를 드리는 거기에, 그들 속에 함께 앉아있다는 착각이 든다.


영화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상처들을 건드린다. 사실 이 상처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쉬쉬하며 꺼내기를 두려워한다. 아니 불편해한다. 가능하면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 어둠에 밀어 넣고 없는 것처럼 살고 싶다. 이렇게도 꺼리는 어둠을 이창동 감독은 빛 속에 꺼내어 보여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영화가 현실의 피로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일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부서뜨린다. 그리고 현실에 맞선다. 왜 피해야 하느냐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어루만져줘야 할 상처가 아니냐고, 이래도 모르는 척 할 테냐고 대놓고 묻는다. 어떻게 누가 고개를 돌릴 수 있을까? 어딘가에 있을 내 이웃이 상상도 못할 아픔을 속으로 삼키며 살고 있는 것을 외면한 시간이 죄스러워진다.


<시>를 보기 전에 망설였다.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제거된 영화일 것은 예상했다. 다만 보고 나서 실망스러울까, 염려되었다. 어떻게 ‘시’를 영화로 표현할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영화는 잔잔했고, 슬펐고, 아름다웠다.


나는 음악 없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음악이 없어도 아름다웠다. 쏴아쏴아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가, 찰랑찰랑 쏟아지는 햇볕이, 톡톡톡톡 베드민턴 공 튕기는 소리가, 후둑후둑 공책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삣쫑삣쫑 지저귀는 새소리가, 다 그대로 음악이고 시였다.


영화는 미자 할머니(윤정희 분)의 다큐멘터리 같다. ‘멋쟁이 할머니’라는 별칭이 딱 어울리는 할머니. 파출부로 안 보이는데 파출부이다. 작은 서민 아파트에서 손자와 함께 산다. 멋 부리기를 좋아하고, 시에 관심이 있다. 어느 날 문화원 시강의 포스터를 보고 덜컥 등록을 한다. 그렇다고 그가 시를 써보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시에 대해 아예 모른다. 하지만 시를 써보고 싶다. 시의 아름다움을 만져보고 싶은 것이다.


할머니는 범생이처럼 문화원 시강의 강사(김용택 시인 분)가 시키는 대로 한다. 사과를 보고, 나무를 보고, 꽃을 본다. 시를 쓰려면 보아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한없이 본다. 보면서 시쓰기를 시도한다.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며 언제든지 꺼내어 느낌을 쓴다. 한 줄 혹은 두 줄이라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발표시간에 미자 할머니가 서러운 듯 어깨를 들썩거릴 땐 가슴이 아려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식당 뒤뜰에 웅크려 가만가만 속울음을 내뱉을 땐 뭉클하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삶이 왜 저러나?’ 싶은 안타까움에 불쑥 화가 났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나약한 그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레이스 머플러를 두르고 다니길 즐기는 미자 할머니. 때로 레이스 달린 치마나 모자를 착용하기도 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레이스처럼 어색하게 살랑거린다. 하얀 빛이 순결을 뜻한다며 웃는 그는 하얀 레이스에 집착한다. 레이스가 그를 지켜주기라도 하듯.


하지만 현실에서 밀려오는 것은 언제나 붉은 빛이다. 손자의 죄, 그것은 피하고 싶은 붉은 색 맨드라미꽃빛이다. 빨간 동백꽃은 미자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이 동백꽃의 꽃술은 노랗다. 상처 속에 품은 영광처럼. 그러나 진료실에서 미자 할머니가 감탄한 동백꽃은 조화(造花)였다. 의사가 “저건 조화예요” 했을 때, 할머니가 여태껏 보아온 아름다움이 가짜였다고 말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죽은 소녀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할머니는 처음으로 진짜 아름다움을 본다. 바닥에 떨어진 살구, 살구의 노란빛은 영광의 빛깔이다. 그토록 갈구하는 영광의 노란빛을 할머니는 주워서 꿀꺽 삼킨다. 노란 살구를 삼키면서 어렴풋이 시에 닿는 느낌이 든다. 느낌만 들 뿐이지 시를 쓰기까지는 아직 통과해야 할 부끄러운 시간이 남았다.


죽은 소녀의 엄마 앞에서 꽃무늬 치마를 하늘거리며 배시시 웃는 미자 할머니. 햇볕에 까맣게 탄 소녀의 엄마는 할머니가 누군지 모른다.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은 낯설고 어여쁜 할머니를 외경심에 찬 듯, 눈부시게 쳐다본다. “예뻐서 꽃을 좋아하시나보다.” 하고 소녀의 엄마는 웃어주기까지 한다. 무릎 꿇고 용서 빌어야 할 할머니는 할 말을 깜빡 잊고 수줍게 따라 웃는다. 그리고 자기가 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살구 떨어진 것을 보고 지금 얼마나 굉장한 것을 깨달았는지에 대해 레이스처럼 살랑살랑 이야기하고 예쁘게 돌아선다. 돌아서다 문득 할 말을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아, 이게 아닌데, 손자의 죄를 용서 빌어야 했는데. 그만 할머니의 얼굴빛이 까맣게 변한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모른다. 하늘거리던 아름다움이 순식간에 툭, 땅에 떨어지고 만다. 살구처럼.


할머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헷갈려한다.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데 시는 아름다움을 노래한단다. 시의 아름다움을 동경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할머니는 보고 보고 또 본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좌절하면서 그래도 다시 본다. 아무리 보아도 아름다움은 커녕 수치스럽고 너저분한 일상만이 보여 목을 죄는 듯하다. 그래서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한다. ‘선생님, 시상(詩想)은 언제 오는가요?’, ‘선생님, 마음속에 시가 있어서 나온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가요?’ 라고.


어느 날 시상이라도 떠오르는 듯 급히 볼펜을 쥐었는데 글씨 대신 빗방울만 가득히 빈 공책을 메웠다. 빗방울은 미자 할머니의 눈물이었을까? 그 눈물은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마음속에 숨어있는 시였을까?


아름다움에 대한 답은 뜻밖에 소녀의 엄마 입에서 나온다. 떨어진 살구가 왜 맛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미자 할머니의 중얼거림에 소녀의 엄마는 가르쳐준다. “설익은 건 나무에 매달려있고, 잘 익은 살구만 땅에 떨어진다”고. ‘잘 익은 살구’는 ‘잘 익은 마음’일 것이다. 마음이 익었다는 것은 삶을 깊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강사가 칠판에 쓴 ‘본다’는 동사의 속뜻은 ‘통찰’이다. 그리고 잘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익기 위해서는 ‘나’ 아닌 ‘너’를 지극히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만이 삶을 보게 한다. 할머니가 소녀의 편에 서서 눈물 흘리며, 소녀를 위해 할 일을 다 했을 때, 소녀를 진실로 사랑했을 때, 기적처럼 시가 보였다. 


시강의 마지막 날 자작시 한 편과 함께 할머니가 놓아둔 꽃빛깔은 하얗다. 순결을 뜻하는 하얀 꽃은 죽음을 예고하는 것 같다. 그 뒤 미자 할머니는 영화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죽은 소녀가 그의 시를 읊으며 다리 위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뛰어내리기 전 소녀는 그리운 듯, 아쉬운 듯, 잠깐 뒤를 돌아다본다. 소녀의 표정은 아늑히 평화롭다. 소녀는 미자 할머니였을까?


아동 성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잠시 떠들썩하다가는 이내 조용해진다. 그 부모들의 아픔, 아이들의 상처는 어딘가에서 한이 되어 울음이 쌓이고 있을 텐데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두 제 갈 길을 가느라 바쁘다.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상처를 말하면 귀를 막는다. 그냥 사고라 여기고 잊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세상 누구도 아픔 없는 사람은 없다고, 이제 그만 밝은 이야기를 하자고 충고한다.


내가 이창동 감독에게 감사한 것은 그들이 감당할 엄청난 무게의 한(恨)을 한으로 끝나지 않게 어루만져준 마음 때문이다. 어둠에 갇힌 상처에 빛을 비춰준 눈길 때문이다.


중학생이었던 소녀의 한은 미자 할머니를 통해 시로 승화된다. 처참하게 무너진 꿈, 떨어져 깨어진 살구 같은 아이의 꿈을 미자 할머니는 밟고 지나가지 않았다. 주워 담았다. 미자 할머니는 아이와 똑같은 상처를 공유한다. 그 아픔을 느끼고 몸부림치다가 시 ‘아녜스의 노래’를 빚는다.


할머니는 아이를 혼자 어둠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녜스가 되어 아녜스의 손을 잡고 환한 빛 쪽으로 끌어당겨주었다. 이 순간 할머니의 삶도 빛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짓밟혀서 망가지고 온통 멍든 아픔으로 얼룩졌지만, 미자 할머니의 사랑을 통해 소녀의 상처투성이 생(生)이 시로 승화된다.


미자 할머니는 상처를 치유하는 위로자 같다. 할머니는 돈으로 거래하는 사람들 속에 끝내 합류하지 않는다. 억울한 약자의 편에서 깨끗함을 지켜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소리 없이 보여준다.


죽은 소녀의 세례명 ‘아녜스’는 ‘순수’, ‘천사’, ‘요정’을 뜻한다. 그리고 할머니의 이름 ‘美子’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이것은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마침내 진짜 아름다움에 닿은 할머니가 쓴 시는 이 시대가 잃어버린 순결의 언어이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 온 아이의 주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처가 마지막 흐르는 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화로이 물만 흐를 뿐. 따사로이 빛살만 아른거릴 뿐. (2010/5 김민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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