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시사랑 고백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내가 읽은 책에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들과 세계의 명시들을 공책에 한 줄 한 줄 정성껏 베꼈다. 만년필에 잉크를 듬뿍 묻혀 옮겨적은 시들을 학교로 가는 길에서 슬금슬금 외웠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만원버스 안에서 흔들리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검정 교복의 여학생은 글자들을 먹어치웠다.
자신의 작은 머리를 사포와 바이런의 자유분방한 언어로 채우며 고리타분한 제도교육에 대한 실망을 표현했으니, 결국 나는 시인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입시를 향한 지리한 길가에서 취미 삼아 삼킨 문장들이 삼심여 년이 지나서도 지워지지 않아, 가끔 노래를 뽑듯 시를 낭송한다. 인간의 입에서, 인간의 몸에서 육화되어 나오는 그건 한 편의 노래이다.
내게 시는 때로 친교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파리에서였다. 샤를 드골 공항으로 달리는 리무진버스 안에서 내 옆에 앉은 어느 영국인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워즈워드의 시를 암송하며 우리는 친해졌다.
시는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예술형식이며, 인생의 가장 짧고도 절묘한 표현이다. 여러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여러 시를 읽을 수는 있다. 좋은 시가 어떤 거냐고 내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보면 자꾸 생각나 저절로 외워지는 시, 소리내어 읽을수록 맛이 살아나는 시, 세월이 지나도 신선함을 잃지 않고 번역해도 죽지 않는 시들이 정말 좋은 작품이다. (최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