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 만났던 한 미군병사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하나의 신비한 암시를 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피부색이 검은 흑인이었으며 하사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이등병에서 네 개쯤 올라간 계급이니까 아마도 입대한 지 일년 반쯤 되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사격지휘본부의 벙커 속에서 내가 이 흑인병사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기가 하는 일에 너무도 열성적인 것, 둘째는 남을 헌신적으로 돕는 것, 셋째는 늘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네 미군부대와 교신하기 위한 전선을 끌어오고 교환대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라, 늘 뛰는 걸음이었으며 그래서 여기저기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었다. 그리고 남들은 대충 일을 끝내고 잡담이나 하고 있는데도 그는 무슨 일이든 매달려서 잠시도 쉬는 일이 없었다. 남들 같으면 간단하고 쉬운 일쯤은 함께 따라온 이등병이나 일등병에게 시킬 터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리면서 그는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부대로 돌아가서 한두 달 있더니 이번에는 이등중사의 계급장을 달고 나타났었다. 그리고 또 몇 달 후에 만났더니 이번에는 일등중사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아무리 특진제도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승진이 빠른 사람은 처음 봤다.
그는 그같은 승진을 노리고 그렇게 부지런히 일했을까? 그가 일등중사의 계급장을 달고도 이등병들에게나 시키는 궂은 일을 혼자 맡아서 다 하려는 모습을 보면 그는 특진에는 무관심한 것 같았다. 언젠가는 내가 틈을 내어 그에게 놀러 갔더니 그는 내 손목에 시계가 없는 것을 보고 자기 시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는 내게 온갖 선물을 싸들고 와서 풀어 놓자마자 시간이 없다면서 휭하니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김우종, 문학평론가) <외롭고 상처받은 너를 위하여, 자유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