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문학사상사’에서 발간된 작가들의 생생한 육성이 담긴 ‘나의 문학수업 시절’을 이따금 들춰보곤 합니다. 이 책엔 50명의 유명 작가(시인, 소설가)의 자기 고백이 담겨 있어 읽는 재미를 듬뿍 느끼게 합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몇 분(이호철, 이병주, 천상병, 황금찬 등)의 인상적이고 본받고 싶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월남한 작가로 민주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호철 선생의 독서에 대한 경험담이 우선 눈에 띕니다. 글쓰기는 남의 글을 읽는데서 출발한다고 믿는 그는 월남 후 부두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가 힘든 형편임에도 책방에서 당시로서는 거금을 내고 좋아한 작가 체홉 희곡집을 네 권이나 사서 읽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글을 읽을 때 독특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책장이 찢어질 정도로 연필로 새까맣게 줄을 치며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글을 뜨겁게 맛있게 그리고 많이 읽을 것을 권하면서 “맛있게 뜨겁게 읽는 글은 분명한 자양(滋養)으로 자신의 핏속에 지금까지도 녹아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동 출신의 이병주 선생은 다작(多作)의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요. 최근에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는 남다른 독후감 쓰기의 습관이 있었는데 이 습관이 그를 대작가가 되게 한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게으르고 의지가 박약했지만 학생시절 한 가지 일만은 지켰다. 어떤 책이건 읽었으면 꼭 독후감을 썼다. 경우에 따라선 한 권의 책을 읽은 독후감이 대학노트 반을 차지하는 예도 있었다. 의무적으로 독후감을 쓰게 되면 그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라도 책을 소홀하게 읽을 순 없게 된다. 내가 교양으로서 다소 가진 것이 있다면 그 독후감을 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던 천상병 시인은 책 읽기를 좋아해서 정신없이 책만 읽었던 탓으로 어머니가 한번은 책을 다 불살라버린 일이 있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글 쓰는 후배들에게 남긴 충고에서 그가 얼마나 진실을 사랑한 시인이었던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꼭 한 마디 하고 싶다. 문학을 하되 진실하게 쓰는 참시인이 돼달라는 부탁이다. 정치를 하는 문학, 명예나 상을 노리는 문학, 뽐내려는 문학인, 이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빛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와닿으면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이 된다.”
99세로 작고한 황금찬 시인은 일제강점기때 일본 동경에서 춘원 이광수를 만나 이렇게 문답을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말이 없고 우리 글이 없는데 어떻게 글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 학생, 그것은 사실이요. 언제 우리 말과 우리의 글로 문학을 하게 될지 그건 모르겠지만 해야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남의 말과 남의 글자를 가지고도 문학을 해야합니다.” 우리 말과 글을 잃고 살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마음대로 우리 말을 하고 우리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니까요.
이번 호 암송추천시는 김종삼 님의 ‘평화롭게’입니다. 시에서 평화의 염원이 물씬 느껴집니다.
평화롭게
김종삼(1921 ~ 1984)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 날들이
평화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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