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발견] 죽은 직유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 직유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이 한결같다. ‘처럼·같이·같은·듯이’ 같은 말이 붙으면 무조건 직유라는 것. 국어시간에 시를 공부할 때 유난히 많이 들어서 그렇다. 원래 수사법은 어떤 대상을 강조하거나 참신한 표현을 얻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표현 대상의 겉치레를 위한 장식용으로 수사법이 필요한 건 아니다. 아무것이나 몸에 걸친다고 다 옷이 아닌 것처럼. 직유는 원관념과 비유하고자 하는 보조관념이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을 때 주로 발생한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 덧없이 빨리 흐르는 세월을 한탄할 때 흔히 쓰던 말이다. 겉으로 보면 직유가 맞다. 형식적으로는 직유의 체계를 갖췄지만 나는 이런 직유를 ‘죽은 직유’라고 부른다. 이미 어디에선가 많이 들었거나 새로운 미적 충격이 없는 직유가 죽은 직유다. 이런 표현은 우리 삶을 앞으로 전진시키지 못한다. 동어반복의 삶만큼 지루한 것이 없는 것이다. 여성의 얼굴을 표현하는 ‘초승달 같은 눈썹’이라든가 ‘앵두 같은 입술’을 케케묵은 옛날 책에서 얼마나 많이 읽었나. 21세기 젊은 연인들의 입에서 설마 이런 수사가 흘러나오는 건 아니겠지?
어떤 표현이 직유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죽은 직유는 직유가 아니라는 과감한 확신이 필요하다. 한마디 말을 하고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새로운 직유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게 우리들의 생활을 종이 두께만큼이라도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