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일화 - 서정주 시인
나는 김구용 씨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평생에 미당 선생을 뵙는 것은 타고난 인연입니다.” 사실 이 땅 위에 목숨을 부여 받아 그분을 알고 지낸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본다. 또 그분을 한국이 낳은 최고의 시인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나의 선배 시인 중에는, 이만하면 내가 뛰어 넘을 수 있으리라고 내 나름대로 자부하는 경우가 더러 있으나, 유독 미당 선생만은 절벽이 가로놓인 듯 앞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 ‘절벽 의식’은 오늘도 나에게 미해결의 과제를 던진다. 나는 아직 멀었다고. 미당 선생은 우선 내가 보기에는 굉장한 직관력의 소유자다. 그는 그냥 허접쓰레기가 될 말도 용하게 살아 있는 생생한 시어(詩語)로 살려 놓는다.
근 30년 전의 조그만 일이 생각난다. 우리가 같이 어느 술집에 들어섰는데 마침 주모가 가을 이불을 꾸미고 있었다. 그걸 본 미당 선생이 “아주머니 가을 이불 꾸미는 걸 보니까 내 마음이 찬란해지는구먼” 했다. 보통 시인이라면 ‘찬란’이란 말을 생각은 하겠지만 입밖으로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그분이 하신 ‘찬란하다’는 말은, 뜻밖의 표현이면서도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 광경 묘사에 꼭 들어맞는, 그야말로 ‘찬란한’어휘의 구사였다.
시가 말을 적재적소에 잘 앉히고 또 빛나는 표현이 되어야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것을 예사로 할 수 있어야 실감나는 말이 배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시인의 한 사람이다. (박재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