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암송칼럼(2008-14)

나의 학창시절과 시암송

日日新 2008. 12. 22. 09:22

 

내가 시를 외우기 시작한 것은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고도 몇 년 후부터였다. 그 이전의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부끄럽게도 별로 내 놓을 게 없다. 초등학교 때 몇 년간은 문예반에서 활동했다. 선생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거나 내 시가 학교신문이나 교지에 실린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문학쪽에 신통한 재주는 없었던 듯하다. 딱 한 번 내 이름으로 동시가 교지에 실렸다.  문예반 선생님이 <자전거 타기>라는 제목으로  대신 써서 내 이름을 올려 놓으셨다. 내가 쓴 시가 아니었지만 내 이름으로 된 시가 활자화 된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동요 부르기는 퍽 좋아했던 것 같다. <섬집 아기>,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구슬비>, <나뭇잎배>, <바닷가에서> 등 이런 동요를 부를 때면 마냥 행복했다.

 

중학교 땐 음악반에 들어갔다. 우리가곡이나 서양가곡 부르는 시간이 좋았다.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국어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생이었던  선생님이 맡으셨다. 인자하신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수업 시작 전엔 꼭 이 구절을 공책에 쓰게 하셨다.  "오늘에 살라. 내일에 의지하지 말라. 그날그날이 일년 중 최선의 날이다."  곱슬머리 상업 선생님이 수업 시간 중에 김소월의 '초혼'을 외워주신 일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고교 시절  어느 여름 밤, 문학병에 걸린 한 친구가 나를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연못으로 데려갔다. 둘은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친구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한구절 한구절 천천히 읊었다. 그때 시가 무척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우리 둘은 시의 감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나도 이 시를 외웠다. 유치환의 '바위',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은 시도 재밌게 외웠다.

 

대학 시절, 교양국어 담당은 김현승 시인의 제자였던 시인 교수였다. 첫 시간, 칠판 위에 서정주의 '자화상' 全文을 쓰고 난 뒤 시를 해설해주셨다. 이 시의 한 구절을 名句라고 하시던 교수님의 감동어린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지금 읽어도 과연 천하의 절창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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