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예술인회 청탁 원고
그리운 범대순 선생님!
한 달 전 ‘무등산 시인’ 범대순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입원실에서 뵐 때만 해도 조금 지나면 툭툭 자리를 털고 자택에 마련하신 시문학관에서 방문객도 맞이하고 강연도 하시고 우리들을 즐거운 식사 자리에 불러내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바람으로 그치고 선생님은 미지(未知)의 세계로 총총히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두 달 전쯤 입원 소식을 듣고 화순노인병원에 갔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병문안차 오신 전남대 교수님 한 분과 새로 발간될 저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환자복을 입고 계셨지만 얼굴은 화색이 돌고 음성은 짱짱하셨습니다.
저만 남게 되었을 때 선생님은 5월말에 예정된 순천 강연에 대한 의욕도 보이시고 그때 하실 강연원고 한 부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게 제가 선생님께 받은 마지막 선물이 되었습니다. 화제가 맏사위 글로 옮겨져서 “글이 재밌고 솔직하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혼잣말처럼 “글은 정직해야 돼”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선생님이 제게 주신 마지막 교훈이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존재를 안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강연회에서나 문학모임 등에서 선생님을 뵐 때면 가까이 다가가 인사도 못 드리고 ‘아 저분이 유명한 영문학자시며 시인이시구나’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지요. 언젠가 어느 문인들 모임에서 축사 부탁을 받고 “<날로 새로워라>란 말이 좋다”고 하시던 모습도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 후 저는 선생님의 시집 ‘산하’ 전편낭송회와, 시집 ‘무등산’ 발간과 영랑시문학상 수상 축하 모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시인의 집 동판 달아드리기 문화사업’(드맹 주관/ 패션디자이너 문광자)의 준비와 진행을 맡는 걸 계기로 선생님과 자주 만나는 행운을 갖게 되었지요.
시집 전편 낭송회를 해보겠다고 하시고 긴장 속에서도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이 ‘파격’을 즐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낭송회가 얼마나 흐뭇하셨던지 선생님은 그날 행사의 플래카드를 서재 벽에 붙여놓으셨지요.
선생님의 1,000회 무등산행과 100회 서석대 등반을 기념하는 산행에 저도 선생님을 따라 서석대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때 젊은이보다 더 잘 걸으시면서 등산 요령도 설명해주시던 멋진 산 사나이 선생님이 무척 존경스럽고 부러웠습니다.
시인 동판 작업을 앞두고는 선생님과 만나는 횟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한 번은 나주에 곰탕 잘 하는 집이 있다고 저를 점심에 초대하셨습니다. 드라이브 중에 선생님은 시암송운동을 하는 제게 도움이 될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대학에서 영시를 강의할 때 선생님은 먼저 시 한 편을 외워서 읊고 학생들에게도 외우기를 권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제자들을 만나면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고 영시를 외우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흐뭇해 하셨지요. 제가 암송의 의미를 여쭈었더니 “암송은 남녀의 결혼처럼 작가와 독자가 하나가 되는 일이며 암송을 하면 작품과 친밀해진다”고 하셔서 선생님도 암송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걸 알고 기뻤습니다.
선생님 행사를 위해서 초대장 발송하는 일을 제가 맡게 되었을 때의 일도 생각납니다. 100여 통이 넘는 초
대장이라 저는 당연히 요금별납 방식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선생님은 우표를 붙여 보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일이 제겐 번거롭게 여겨졌지만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하는 선생님의 소박한 인정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시와 칼럼을 대할 때면 젊은이들보다 더 남성다운 야성과 활달한 기상이 느껴져 싱싱한 에너지가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선생님이 남도일보에 칼럼을 연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찾아 읽어본 후론 애독자가 되었습니다. 칼럼이 나오는 목요일이 기다려지기도 했지요.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거침없는 담론을 펴시던 선생님은 멋진 최장수 칼럼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 영국 신사 같은 단아한 모습과 만나는 분들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올채, 올채…” 하시며 진한 공감을 보여 주시던 따뜻하고 정겨운 모습도 제 마음에 아름답고 고맙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범대순 시문학관 개관 며칠 전엔 저를 서재로 초대해주셔서 선생님과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전축에 비발디 ‘사계’ 음반을 올려놓으셨지요. “홀로 있는 시간에 종종 클래식을 듣는다”는 말씀을 듣고 산과 시와 함께 음악도 선생님의 동반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저물녘 서재에서 감미로운 멜로디가 흐르는 동안 노시인은 나직이 제게 한 말씀 하셨습니다. “나이가 들면 외로워요!” 아, 선생님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무렵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던지 ‘법정에게’라는 시 한 편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버리고 떠나기// 버리고 안떠나기// 안버리고 떠나기// 안버리고 안떠나기” 무슨 선문답(禪問答) 같은 이 시가 재밌다고 하자 선생님도 이 시가 맘에 드셨던지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면서 여러 번 암송하셨는데 선생님이 가시고 나니 이 시를 쓰신 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문 관장과 얘기하면 편해서 좋아요!”라고 하시며 어린 저를 살갑게 대해주시던 선생님이 가시니 육친을 여윈 듯 선생님의 부재(不在)가 크게 느껴집니다. K시인과 함께 갔던 두 번째 병문안 땐 말씀도 못하시고 반가운 눈빛만 주시던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이 오래오래 제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몇 년 전 광주에서 열린 한국시인협회 (선생님은 명예로운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으셨지요!) 세미나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축사의 일부입니다. 무등산을 애인처럼 사랑하셨던 큰 시인다운 명문(名文)으로 생각됩니다. 이 글이 좋아서 제가 꾸민 무등산 옛길 <시의집> 벽에 붙여놓았습니다.
“나는 분명히 무등산이 시인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꼭 전달해달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애정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8,500만년이라는 위대한 시간과 세계 제일의 주상절리(柱狀節理)라는 공간의 축복을 받았고 그 애정을 전달 받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답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좋은 시를 쓰고 좋은 시인이 되십시오. 오늘 흔히 보이는 만산(滿山)의 잡목(雜木) 말고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되십시오. 이 말이 나를 통하여 무등산이 그 큰 시간과 공간을 같이 한 정기(精氣)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보내는 애정이 담긴 소망입니다.”
기독교계의 원로이신 104세 방지일 목사님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는 않겠다”고.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멋과 품위를 간직하신 분으로 우리 모두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선생님 시 중에 제가 좋아하는 ‘구석참’을 적어봅니다.
“방 가운데/ 이야기꽃이 피는데// 등잔불 뒤에/ 구석참 한 사람// 무등산 야생화처럼/ 숨어서 웃고 있다// 세상일 넘치고/ 할 말 어찌 없으랴// 산에 고개 많고/ 강에 굽이 많고// 숲을 보라는 말/ 바다를 보라는 말// 푸짐한 말잔치/ 낄 틈 없지 않으련만// 그대로 구석에 앉아/ 그 사람 그저 웃고 있다”
선생님은 지금 저 세상 어느 구석에 앉아 웃고 계실까 궁금합니다.
선생님을 멀리 보내드리고 저는 오래 전부터 애송하던 조병화 시인의 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를 종종 읊조려보곤 합니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문길섭 (드맹아트홀 관장/ 시암송국민운동본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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