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시사랑
강만, 시인
日日新
2011. 10. 1. 19:40
나는 시의 종이다. 시는 나의 지엄한 상전이며 가장 좋은 친구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문득 문득 나를 불러 세우지만, 나는 그에게 복종하며 사는 것이 퍽 행복하다.
어떤 땐 고단한 몸으로 마악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가 찾아와 귀찮게 깨울 때도 있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땐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식사를 방해할 때도 있다. 이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와 괴롭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가 나에게 찾아오는 것을 불평하거나 귀찮아 해 본 일이 없다. 아니 귀찮아하기는 커녕 기다리던 친구가 먼 곳에서 오기나 한 것처럼 하룻밤에도 몇 번씩이나 불을 밝히고 그의 무릎 아래 다소곳이 엎드려 귀를 기우린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한 그의 목소리를 받아 적는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나이들어 이렇게 복종하며 살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주머니에 천만 냥을 넣고 사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다.
지상에서 나의 발자국이 가을 꽃잎처럼 스러져버리는 그날까지, 나는 기꺼이 그의 종으로 살 것이며 그런 운명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오오 시여, 나는 당신의 행복한 종이로소이다. (강만, 시인/ 광주 서구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