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日新 2009. 11. 17. 20:00

시인의 일화 - 구상 시인


구상 시인은 옛날로 치면 대인군자(大人君子)다. 김종삼 시인은 그를 우리 시대 ‘서울의 예수’라고 말했다. 나 역시 김종삼 시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큰 인물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이 시인은 일찍이 박정희 대통령과는 사석에서 서로 말을 터놓고 지낼 만큼 친한 친구였다. 박정희 장군은 대통령이 되자 그를 불러 서울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한 일간지의 사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군사정부나 신문사나 양쪽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슬기롭게 거절했다.


또 그는 유신개헌 때 유정회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고는 동경의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고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평생의 지병(持病)이었던 폐수술을 받았다. 장기 입원 후 퇴원할 때 입원비를 계산하려 하니 이미 주일 대사관 측에서 모두 지불한 뒤였다고. 후에 알고 보니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귀국 후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갔더니 대통령은 씩 웃으면서 “당신 참 고약한 사람이야”하면서 어깨를 툭 쳤다고 한다.


박대통령이 사망한 지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구상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점심 때에도 통화가 되지 않아 저녁때 다시 전화를 했다. 역시 아무도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그때서야 “여보세요” 하는 시인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이 시인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갔던 것. 생각해보니, 그날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1주기였다. 본인은 밝히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친구의 무덤가를 맴돌다가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육명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