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암송칼럼/시암송칼럼(2021)

시인을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

日日新 2021. 7. 17. 06:31

오래 전 계간 시 전문지 시인세계가 마련한 기획특집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일급 시인들은 어느 시, 어느 시구를 절창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특집이어서 대단한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이 특집을 기획한 편집위원은 다음과 같은 기획의도를 밝혔습니다.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109명의 시인들이 고백성사하듯 밝힌 우리 시의 최고의 순간, 황홀한 절정을 맛보게 한 가장 빛나는 표현들은 한 시대와 사회를 거치는 동안 시 속의 시, 시 속에 압축된 시 예술의 백미(白眉)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 중 몇 시인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고교생 때부터 소설가 문순태와 함께 김현승 시인을 따르던 이성부는 시인의 플라타나스의 한 구절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를 뽑고 다음과 같은 느낌을 적어놓았습니다.

열여섯 살의 여드름 투성이었던 소년에게 이 시구는 충격이라기보다 큰 그리움의 하나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먼 길외로움의 실체가 눈에 선하게 잡혀지는 것 같았다. 집을 떠나 어디론가로 가고 싶다는 여행에의 욕망, 그 여로에서 터득하게 될 고독의 본질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는데, 세계와 삶에 대한 어떤 각성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고교 시절 문병란 시인을 스승으로 만나고 대학에서 시를 가르쳤던 허형만 시인은 만해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의 한 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에서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60년대 중반, 법대로 가기를 권하신 아버지 명령을 배반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택하여 상경한 서울은 참으로 우울의 극치였다. 날마다 흑석동 연못시장 안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지지고 볶은 문학론만 해도 하룻밤이면 족히 서너 말은 될 성싶다. 밤새 미당의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고 있던 어느 날 밤, 만해가 내게 와 나의 정수박이에 기름 한 바가지를 붓고 떠났다.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희열을 맛본 순간이었다.”

 

생전에 우리 시단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던 성찬경 시인은 구상의 노경(老境)’ 중의 한 구절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란 구절을 돋보이게 합니다. 이제 노년에 들어선 나이가 돼서인지 이 구절이 유난히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한국 현대시에 명시 명구도 많지만 문자 그대로 나를 벼락치듯 전율시키는 시구는 바로 이 구절이다. 백금은 무게가 나가는 귀금속 중의 귀금속이다. 황금보다 더 귀하다. 그러나 그 빛은 황금처럼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흰색이다. 노년의 은유로 이보다 더 들어맞는 것은 없다. 그렇다,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

 

시인을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들을 대하면서 마음을 흔드는 시구가 많을수록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로울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호 암송추천시는 유경환 님의 나직한 속삭임입니다. 화자는 가슴에 울음을 채우면 하느님을 흔들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네요.

 

나직한 속삭임/ 유경환 (1936 ~ 2007)

 

바람이

산을 흔들 수 없어

물을 간질이면

물 속의 산

흔들린다

나도

하느님을 흔들 수 있다

내 가슴에

울음을 채우면

 

무등일보 격주간지 아트플러스에 연재한 칼럼 '문길섭의 행복한 시암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