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송 추천시

묵언의 날 (고진하)

日日新 2009. 2. 26. 21:47
 

묵언(黙言)의 날


- 고진하



하루종일 입을 봉(封)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봉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고진하/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 졸업.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김달진 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얼음수도원’등이 있음.